[유머컬럼][유머위드십]#05.죽음도 겁내지않는 진정한 풍자유머의 고수

최규상 유머코치
2020-05-27
조회수 2151

오늘은 조선말에 있었던 이야기 한 토막 해드릴게요. 당시 최고의 세도가였던 민 씨 집안에 처음으로 비누가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대감들이 비누를 신기해하며 앞 다투어 비누로 손을 씻으면서 최고의 물건이라고 아부했습니다. 이때 손님 중의 한 사람인 이상재 (李商在) 선생이 갑자기 비누를 씹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비누를 먹을 수 있느냐고 말하자 이상재 선생이 번개처럼 한마디를 내리칩니다. 

“여러분 모두는 비누로 얼굴과 몸의 때는 벗기지만 나는 뱃속에 낀 때를 벗기려고 먹고 있소이다."

참석자들이 모두 웃었지만 씁쓸한 뒷 맛에 숙연해졌다고 합니다. 이상재 선생은 껍데기를 씻는 것보다 마음 때를 씻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저런 상황을 연출했을 것입니다. 당시 혼탁스러운 국내외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고 온갖 불법을 저지르는 사악한 관리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비유해서 던진 최고의 풍자입니다. 


그는 한 때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어 탐관오리와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후 독립운동가와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매국노에 대한 날카로운 일침을 가한 풍자의 달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의 말속에는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는 무림의 고수입니다.  

어느 날, 이상재 선생이 미술협회의 창립식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창립식장에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일본인 고관들과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 인물들도 모두 참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완용과 송병준이 이상재 선생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게 되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그들을 얼굴을 보자 갑자기 비위가 상해서 말했습니다.

"두 대감들께서는 이젠 동경으로 이사를 하시지요" 

갑자기 이사하라니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별안간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두 대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렇게 답합니다.

"대감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들이시니까, 동경으로 가면 일본도 망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 

이완용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친일파 인물들은 모두 낯빛이 변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하지요. 


그는 풍자에는 매국노에 향한 비판이 숨어있었고, 나라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풍자는 널리 퍼져나가 백성들에게 회자되었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은 이상재선생 이야기에 박장대소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의 명성은 조선 팔도로 퍼져나가면서 이념, 종교, 지역, 사회를 넘어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상재 선생께서 돌아가셨을 때 10만여 명의 백성들이 모여 사회장으로 치면서 마치 부모의 죽음처럼 슬퍼했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풍자를 딱 한마디로 정의하면 '두려움 없는 날카로운 풍자'입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재치있는 말 화살을 날릴 줄 아는 고수였습니다. 또한 이상재 선생은 유명한 연설가로도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강연에는 항상 형사가 따라다녔습니다. 그가 종로의 기독교 청년회관 강당에서 사회를 볼 때도 많은 형사들이 조용히 숨어들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쭈욱 둘러보니 청중들 속에 형사들이 많았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짐짓 먼 산을 바라보는 체하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허허,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구나!"

그 말에 청중들은 뱃살을 움켜쥐고 크게 웃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일본 형사를 '개'라  불렀고, 순경을 '나리'라고 칭했기 때문에 형사와 순경을 합치면 '개나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풍자 위트는 두려움이 없었기에 장소와 상황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은 후, 일본은 한국의 명사들을 모아 강제로 일본 시찰을 시켰습니다. 이상재도 어쩔 수 없이 그 시찰단에 끼여 일본에 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일본 정부는 시찰단에게 무기를 만드는 병기창을 구경시켰습니다. 

"동경의 이 병기창은 동양에서 제일 큽니다" 

일본이 동양에서 가장 강한 나라임을 은근히 자랑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동경 시장이 이상재 선생에게 구경 소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이상재 선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오늘 병기창에 가보니, 대포며 총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습니다. 
그걸 보니 과연 일본은 동양에서 제일 센 나라임에 틀림없었소. 그러나 나는 몹시 슬펐소이다. 
성경에 이르기를, '칼로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하였으니, 일본의 앞날이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일본을 칭찬하는 줄 알고 좋아하다 다 듣고 보니 일본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참석한 일본 관리들이 몹시 분개했지만 성경 말씀을 빌어서 한 말이니 트집 잡을 수도 없어서 꼼짝없이 무안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서 정말 속이 다 후련해지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고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풍자를 던질 수 있을까? 이상재 선생이야말로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고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상재 선생은 이렇게 적을 향한 날카로운 유머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긍정의 해학이 넘쳤던 분입니다. 이상재 선생이 감옥살이를 하고 나서 출옥하는 날,  제자들이 몰려와서 얼마나 고생하셨느냐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자네들은 얼마나 호강을 했는가.”

말속에 뼈가 있습니다. 온 조선땅 삼천리 방방곡곡이 다 감옥인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는 따끔한 질책이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그는 날카로운 칼만 갈았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는 삶 속에서 늘 여유를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재 선생이 어릴 적 변영로를 길거리에서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변정상 씨~변정상 씨~~!!"

변정상은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변영로의 아버님 성함이었습니다. 
기분이 나쁜 소년 변영로가 이상재 선생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 아버님과 저를 구분도 못하시다니 너무하십니다."


그러자 이상재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잘못 말한 게 뭐가 있다고?

너는 변정상의 씨(아들)가 아니었더냐? 

그러니 변정상 씨가 맞는 거 아니냐?"

여러 차례 일제에 의해 옥살이를 하기도 한 이상재 선생은 오로지 일본에 항거하는 애국심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77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고,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현재 종묘 입구의 왼쪽에 이상재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고 하니 조만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그의 기개와 삶의 철학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 하나 내려놓습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일본총독부의 한 관리가 이상재 선생을 매수하려 찾아왔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거금을 놓고 나가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평안히 지내십시오.”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돈뭉치를 던지며 말했습니다.

“나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면 선생님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그러자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으로 삽니다.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총과 칼로 싸운 독립운동가와 달리 말을 대포 삼아 어려운 시절을 풍운아처럼 살았던 이상재 선생의 유머를 살펴보면서 최고의 유머는 바로 '두려움 없는 용기'임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용기 뒤에는 하나님과 조국이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매국노와 일제를 가지고 놀아버린 그의 내공까지는 멀었지만, 우리 삶을 칭칭 묶고 있는 어둠의 세력 정도는 가지고 놀면서 풍자해보기로 마음먹어 봅니다. [글. 최규상 유머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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